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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동존중과 적폐청산의 허상을 메꿀 ‘권리’의 정당성

김영수/상지대학교
금속노조연구원   |  

 

‘노동을 존중하는 나라’, ‘나라다운 나라’, ‘적폐를 청산하고 개혁을 추구하는 나라’, ‘남북 평화통일을 이루는 나라’. 문재인 정부가 아주 쉽게 내뱉는 참으로 화려한 단어들이다. 적지 않는 노동자들이 그 수려함의 미혹에 빠져들고 있는 것도 사실이다. 그런데 왜 내게는 ‘궁중 담벼락을 타고 스멀스멀 넘나드는 희언’으로 다가오는 것일까. 나 혼자만의 느낌이면 그러려니 무시할 수 있지만, 그것은 아닌 것 같다. 노동의 권리를 불법적으로 빼앗긴 해고자들, 노동조합의 권리를 앗아간 행정 권력, 허울뿐인 비정규 노동자들의 권리, 산별노조의 기본적 권리조차 존중하지 않는 자본과 정부 등. 여기저기에서 아우성이다. 헌법과 법률이 보장하는 노동자들의 권리를 시행령과 행정규칙이나 행정명령 등으로 무시하는 권력 시스템이 문제이고, 노동자들의 기본적 권리를 존중하지 않는 권력의지가 문제라는 것이다.

 

권력 시스템의 적폐에 대해서는 털끝조차 손대지 못하면서 예전의 권력자들을 구속하는 것으로, 스스로 개혁하는 것이 불가능한 사법 권력이나 군부 권력, 소위 적폐세력이나 적폐 시스템이 알아서 개혁하고 혁신하게 하는 기가 막힌 ‘언설유희’만으로 촛불정신을 계승한다니? 강력한 힘을 앞세워 평화를 일구겠다는 냉전체제의 눈으로 남북평화를 말하다니! 촛불이 밝힌 권리가 무엇인지를 알기나 한지, 자못 궁금하다.

 

태어나는 순간부터 자신을 휘감고 있는 권리를 일상에서 깊이 사유하며 살지 않지만, 그것이 어디에서 유래하는 것이고, 그 힘의 범위와 한계에 대한 기준은 무엇을 가지고 설정할 수 있는 것일까. 한 번 쯤은 고민해 볼 의제다. 노동이 존중되어야 할 근본적 가치가 권리와 자리하고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 해답의 실마리조차 잡기가 쉽지 않다. 이러 저러한 ‘권리’가 있고 그 ‘권리’에 상응하는 책임과 의무가 있다는 것에 대해서는 어릴 때부터 배웠지만, 또한 다양한 ‘권리’의 의미와 그 유래를 알려주는 경우가 드물었던 것도 원인이지만, 일상에서 타인의 권리를 대하는 태도나 서로 착취하고 눈앞의 이익만 생각하게 만드는 사고의 패턴을 변화시키지 않는 것도 마찬가지이다.

 

보통 너든 나든 국가의 권력이 시스템 속에 체화된 힘으로 권리를 지배하고 관리하는 것을 당연시한다. 권력의 힘 앞에서 유순해지는 것이 습관이 되었다고 뭐라 해도 할 말이 없다. 사람들이 권력에 저항하는 권리들을 비판하거나, 함께 하려 하지 않는 이유가 아닐까 생각한다. 그래서 ‘권리’가 무엇이냐고 질문을 받는 순간, 머리에 맴도는 것은 ‘선거에 참여할 권리, 노동을 할 권리, 교육 받을 권리’ 등이지만, 이러한 권리가 자신에게 왜 부여되었는지 고민하는 경우가 드물다. 대부분 헌법이나 법이 보장하고 있는 것을 가지고 왜 그리 고민하느냐는 무사고의 늪으로 빠져 들고, 권리에 대한 무지상태조차 자랑스럽게 드러내기도 한다. 사람들의 ‘권리’가 권력이나 권한보다 강력할 수밖에 없는데도 말이다.

 

첫째, ‘권리’란 사람들이 태어나는 순간부터 누릴 수 있는 힘이다. 인간으로 태어났다는 이유만으로 자연스럽게 주어지고, 그 누구도 부정할 수 없는 천부인권적 권리를 의미한다. 자연권으로 이야기하든, 혹은 기본권으로 말하든, 사람이 본성적으로 누려야 할 것들이다. 사람들은 생명과 자유와 재산을 보다 효율적으로 보호하고 유지하기 위해 시민사회를 만들고, 그 사회를 유지하는데 공동의 권력이 필요한데, 이 과정에서 사람들 개개인이 자신의 힘을 누군가에게 또는 무엇인가에게 위임한다는 계약을 맺는 방식으로 공통의 권력을 만드는 것이다.

 

둘째, ‘권리’란 공공의 권력체계를 만들 수 있는 힘이다. 민주공화정을 선포한 국가들이 헌법에서 ‘모든 권력은 국민으로부터 나온다.’고 규정하고 있다. 권력의 입장에서는 이 규정을 권력을 국민과 떨어뜨리고 국민은 단지 권력자들을 선출하면 되는 것으로 보겠지만, 새로운 권리수호자는 이 규정을 다르게 본다. ‘모든 국민은 권력을 만들어 운영한다.’ 왜냐하면 ‘권리’를 가지고 있는 사람들끼리 서로 계약을 해서, 서로가 자신의 권리 중 일부를 떼어내 사람이 아닌 공공의 인격체를 만들기 때문이다. 단지 공공의 인격체 중 가장 강력한 것이 국가이지만, 국가도 자신의 자궁 역할을 한 권리를 침해할 수 없다.

 

셋째, ‘권리’란 ‘권력’에게 공공적 시스템이 제대로 작동하도록 요청할 수 있는 힘이다. 공공의 권력체계는 권리가 부여한 권한의 범위 내에서 공공적 시스템을 작동시켜야 한다는 의미이다. 그런데 종종 권리가 부여한 공공 권력체계의 의무는 사라지고, 권력의 위력과 권한만이 권리의 주체들을 지배하려 한다. 이러한 현상을 바꾸어내는 것도 권리의 주체들이다. 하지만 공공의 권력체계를 만드는 과정에 수많은 권리의 주체들이 참여하고, 권력을 바라보는 시각과 가치의 차이가 존재해서, 똑같은 목소리로 똑같이 행동하기가 쉽지 않다. 공공의 권력체계는 권리의 이러한 약점을 이용하려 한다. 수많은 시위와 집회도 권리를 행사하는 권리의 주체들이 권력체계의 변화를 요구하기도 하지만, 그것은 동시에 다른 권리의 주체들에게 권리를 함께 행사하자고 요구하는 과정이기도 하다.

 

권리가 권력을 지배하고 관리하는 것이 정당하다. 생각을 전환하자. 권력 중심의 시스템을 권리 중심의 시스템으로 전환시키자. 시대가 요구하는 전환의 가치이다. 권리의 주체들이 국가를 지배하고 관리해야 한다는 원리이자, 권리가 권력을 통제해야 한다는 원리이기도 하다. 장자크 루소는 <인간 불평등 기원>에서 그 원리의 정당성을 제시하고 있다. “원천적으로 국가란 인민의 일반의사로 존립하는 것이고, 인민이 원하지 않는 제도는 순리에 맞지 않는 것이므로, 타파될 수 있고 또 그렇게 되어야 한다. 통치자가 국민의 안전한 생활을 지켜준다는 구실로 권리를 양도하라고 요구했다면, 인민들이 통치자를 세우는 이유는 그에게 예속되기 위해서가 아니라 자기들의 자유와 권리를 지키기 위해서였다. 이것은 모든 국법의 기본적인 준칙이다.”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