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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로나19의 진짜 숙주는? 노동자는 자유로울까

김영수/상지대학교
금속노조연구원   |  

코로나19, 말만 들어도 지겹다. 코로나19는 1년 만에 230만 명 이상의 목숨과 일상의 자유로움을 앗아갔으니 말이다. 마스크 쓰기나 거리두기를 억압이나 구속으로 여기는 사람들에게는 더욱 그러할 것이다. 그런데 칼럼의 제목이 또 코로나19라니. 아마도 뻔한 이야기를 재탕하고 또 삼탕하는 것 아닌가 생각할 수 있다. 하지만 나는 이번에 코로나19를 타산지석(他山之石)으로 삼아 코로나19의 진짜 숙주를 말하고 싶고, 노동자나 노동조합이 여기에서 자유로운지 고민하고 싶다.


사람들은 태양과 자연과 농사의 조화로 태어났던 24절기의 입춘에는 ‘입춘대길(立春大吉)과 건양다경(建陽多慶)’의 부적을 붙여 집안의 복과 경사를 끌어들이려 하는데, 지구촌 사람들 모두는 2021년에 어떤 복을 받고 싶을까? 뭐니 뭐니 해도 코로나19에서 해방되는 자유일 것이다. 그러나 쉽지 않은 일이다. 코로나19는 변이를 거듭하거나 코로나 바이러스의 새로운 종이 창궐할 수 있기 때문이다. 


최근 중앙일보 기사로 게재된 것이지만, 2021년 2월 5일 영국 케임브리지 연구진과 미국 하와이대 연구진도 지구촌의 온실가스 배출이 증가하여 기후변화가 발생하고, 중국 남부와 미얀마 지역 등이 박쥐가 서식하기에 좋은 열대 사바나와 낙엽수림으로 바뀌어 100종 이상의 코로나 바이러스를 보유하고 하고 있을 40종의 박쥐가 이 지역으로 유입되어 있다고 밝혔다. 또한 지구촌에 분포하고 있는 박쥐 개체군은 약 3,000종의 서로 다른 코로나 바이러스를 보유하고 있을 것으로 추정하기도 하였다. 이 연구진은 기후변화와 박쥐에 초점을 맞추어 코로나19의 발병 기원을 재구성하는 데 중요한 단서를 찾고자 하였다. 연구진의 연구 결과가 던져주는 의미가 적지 않다. 코로나19의 숙주를 박쥐에서만 찾지 말고, 탄소배출에 열을 올리면서 기후변화를 이끌어 왔던 자본주의 산업구조와 사람들의 생활 패턴에서 코로나19의 실질적 숙주를 찾자는 것이다.


자본주의 산업구조와 사람들의 생활패턴은 서로 공생한다. 서로가 서로를 숙주로 삼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사람들은 편리함과 안전함을 추구했던 종의 대표 주자이고, 자본주의 산업은 그 대표 주자들의 본성과 욕망을 자극하거나 조작하는 힘을 운용하거나 이윤을 추구하는데 능수능란하다. ‘편리함의 중독’은 생활의 중심으로 자리 잡는다. 물론 생활의 ‘편리함’은 ‘안전함’과도 일란성 쌍둥이다. 사람들은 편리와 안전의 새로움을 지속적으로 추구하고, 자본주의 산업은 그에 상응하는 기술을 개발하여 상품을 생산하고 유통한다. 노동자들도 이런 공생관계의 주인이다. 삶의 수단이 임금뿐이고 ‘편리함과 안전함’을 추구하는 소비자의 한 사람이 노동자의 숙명이다. 노동조합도 이런 숙명의 질곡에서 쉽게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진짜로 편리하고 안전해야 할 곳은 일터이고 노동현장의 권리이어야 하는데, 현실은 역설만이 존재한다. 노동자나 노동조합이 소비의 방식을 통해서만 노동현장 밖의 편리와 안전을 추구하고 또 자신의 권리를 대의제의 틀에 맡기려 하다 보니 나타나는 현상일 것이다. 


그런데 이러한 공생관계가 지구촌의 공멸을 앞당길 것이라고 우려하는 사람이 있다. 우리들에게 생물지리학과 <총·균·쇠>로 친근한 재래드 다이아몬드(Gered Diamond)다. 그는 <문명의 붕괴>에서 과거의 위대했던 문명이 붕괴하게 된 원인을 자원의 과소비(과잉생산과 과잉소비)와 관계망의 확대로 지적하고 있다. 코로나19는 이러한 ‘편리(안전)순환체계’의 틈을 비집고 들어와서 사람들의 목숨을 앗아가고 일상을 파괴하면서 문명의 붕괴까지 예고하고 있다.


코로나19는 사람들에게 자신의 예고를 무시하지 말라고 하는 듯 하다. 이제는 코로나19의 숙주를 너와 나의 삶 속에서 찾아 나서라는 것이다. 2021년 2월이 그 시작이길 염원해 본다. 왜 2월인가 하는 이유를 인디언 종족들의 삶속에서 찾아보자. 2월은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영혼을 정화하고 속죄하는 달’이라는 의미를 지니고 있다. 그래서 약 1만 3천 년 전부터 아메리카 대륙에 정착한 것으로 알려진 인디언들도 2월을 의례와 정화의 달로 받아들이며 살았다. 클라마트 종족은 2월을 ‘비 내리고 춤을 추는 달’로 여겼으며, 호피 종족은 ‘몸과 마음을 정화하는 달’로 생각하였다. 


우리도 2021년 2월을 편리함에 중독되어 있는 나와 자본주의 산업구조의 공생 패턴을 정화해보는 달로 여기고, 삶과 체제의 대전환을 입만이 아니라 마음과 몸으로 체화하는 계기로 삼으면 어떨까 생각해 본다. 코로나19의 진짜 백신이 코로나19를 초대했던 삶의 방식을 정화하고 속죄하는 그곳에 숨겨져 있다는 사실을 말이다.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