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I와 노동해방
칼럼을 쓸라치면 항상 무엇을 써야 할지 주제 잡기가 만만치 않다. 주제 잡는 데 만 며칠이 걸리곤 한다. 그래서 칼럼을 부탁한 그에게 뭘 쓰면 좋겠냐고 물었더니, 새로 정부가 들어섰으니 ‘신정부에 바라는 노동정책’이 어떻겠냐고 했다. 시의적절하고 마침 노동부장관 후보자로 김영훈 민주노총 위원장 출신이 지명되어 모두가 기대 속에서 있는 터라 괜찮을 듯 싶었다. 그런데 내용을 고민하다 잘 정리가 되지 않아 챗GPT에게 물어보기로 했다. ‘신정부가 추진해야 할 노동쟁책적 주요 과제는 무엇일까?’라고 물었다. 몇 초 만에 대답이 나왔다. 모두 7개의 핵심정책과 보론으로 구성되었으며, 각 정책마다 그 배경과 세부과제가 제시되어 있었다. 아래 박스는 이를 그대로 옮긴 것이다. 배경과 세부과제는 지면 관계로 ‘정책1’(불평등 해소와 노동소득 분배 개선)의 것만 인용하고 나머지는 생략했다.
1. 불평등 해소와 노동소득 분배 개선
○ 배경 - 상위 10%의 소득·자산 집중도가 OECD 최고 수준 - 자산·소득·노동시장의 양극화가 세대·성별·지역 불평등으로 확대 - 플랫폼·특고 등 비표준 고용이 증가하면서 노동자 보호는 취약 ○ 과제 - 공정임금제 도입 또는 고소득자에 대한 사회적 임금 환수 - 최저임금의 실질적 생활임금화 - 대기업-하청, 정규직-비정규직 간 이중구조 해소 및 차별 철폐 - 플랫폼 노동자, 특수고용 노동자 보호제도 확립 (산재보험, 고용보험 포함)
2. 노동시간 단축과 일-생활 균형 3. 집단교섭력 강화와 노조 권리 확대 4. 산업구조 전환과 정의로운 전환(Just Transition) 5. 청년·여성·고령노동자 등 취약계층 보호 6. 사회적 대화와 거버넌스 복원 7. 공공부문 노동 개혁
보론: 이재명 정부 특유의 정책적 방향성 고려 - 기본소득, 기본금융, 기본주택 등 '기본 시리즈'의 노동정책 연계(예: 플랫폼노동자 기본소득 연계 실험) - 디지털 권리장전, AI와 노동의 미래 대응도 주요 테마가 될 수 있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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놀라웠다. 내가 썼다면 과연 이보다 나았을까? AI의 제언에 더 보태거나 수정할 내용이 잘 떠오르지 않았다. 그동안 노동계가 주장해온 주요정책이 총망라되어있으며, 보론으로 특별히 이재명 정부의 간판개념인 ‘기본사회’와 연계하는 노동정책을 제시하는 친절함도 보여주었다. 이를 문장으로 만들면 그대로 칼럼이 될 것 같았다, 아니 칼럼으로 만들어 달라면 또 금방 몇 초 안에 만들어 주겠지. 그렇게 하려다 갑자기 찜찜한 생각이 들었다. 그렇게 하면 그게 나의 글이라 할 수 있을까? 내 이름으로 내놔도 괜찮은 걸까? 뭐, 지금처럼 인용한 글의 출처를 밝히듯, 이 글은 AI의 도움을 받았다고 밝히면 되지 않겠나.
이런 생각을 하다 문득 얼마 전 빌 게이츠가 한 말이 떠올랐다. 그는 한 인터뷰에서 “앞으로 10년 내 직업의 대부분이 AI로 대체되고, 주 2일제 시대가 올 것”이라고 했다. 신기하게도 1930년 케인즈가 100년 후인 2030년경에는 주 15시간 정도만 일하면 되는 시대가 올 것이라 한 말과 맞아떨어진다. 정말 그럴까? AI가 인간을 대체하고, 과연 노동 없는 사회가 오는 것일까?
물론 그동안에도 자동화의 급속한 발전을 바라보면서 ‘노동의 종말’론이 심심치 않게 대두되었지만, 노동은 사라지지 않았다. 없어지는 노동이 있으면 새로 생기는 노동도 있어, 우리가 경험한 것은 노동의 종말이 아니라 노동의 변화였다. 이번엔 다를까? 육체노동을 넘어 사무직, 정신노동의 영역까지 파고드는 AI의 위력을 실감하면서 AI가 인간을 지배할 날이 머지않았다는 경고가 새삼 다가온다.
AI의 기술적 가능성에 대해서는 논란이 많다. 일정 분야에 특화된 현재의 ‘좁은 인공지능’(ANI)에서 인간의 지능과 같은 ‘범용’ 또는 ‘일반 인공지능’(AGI)으로 발전할 수 있을지, 그리고 이를 뛰어넘어 과연 인간의 능력을 초월하는 ‘초지능 인공지능’(ASI)으로 진화할지는 아직 전문가들 사이에서도 의견이 분분하다. 그런데 이쯤에서 생각해봐야 할 문제가 있다. 실현 가능성 여부를 떠나 기계가 인간의 노동을 대체하는 것은 우리에게 축복일까, 재앙일까?
산업화 초기부터 자동화는 많은 사람의 우려를 자아냈다. 자동화로 일자리를 잃으면 생계유지가 어렵기 때문이다. 그래서 ‘해고는 살인이다’라는 외침이 가슴에 와닿는다. 그런데 일을 하지 않아도 생계에 문제가 없다면? 그러면 자동화를 우려할 이유가 없지 않을까? 여기서 많은 사람이 ‘기본소득’을 소환한다. AI가 인간을 대신해 일한다면 생산성도 높아지고 하루 24시간, 일 년 내내 쉬지 않고 일할 수 있어 더 많은 수익을 내지 않겠나. 이를 기계세, 로봇세 등 세금으로 거두어 노동자들이 조건 없이 나눈다면 생계에 문제가 없을 것이고, 자동화를 반대할 필요도 없지 않겠냐는 것이다.
여기에는 노동은 단지 생계수단이라는 생각이 담겨있다. 즉, 노동은 인간이 생계를 위해 억지로 하는 것이지 좋아서 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따라서 인간을 하기 싫은 노동에서 해방시키고, 더 많은 여가시간을 즐기게 해주는 자동화는 축복이 아닐 수 없다. ‘탈노동’ 사회로 가는 길을 막지 말고 그에 적응하는 새로운 사회복지시스템을 구축하면 된다는 생각이다.
일견 타당하게 들리면서도 많은 질문이 생긴다. 우리가 외쳤던 ‘노동해방’은 무슨 뜻이었을까? 일하지 않는 사회, ‘탈노동’ 사회를 말하는 것이었나? 그렇다면 AI는 정말 축복이 아닌가. 우리는 왜 일을 할까? 단지 돈을 벌기 위해서? 인간은 노동을 통해 상호 연결·유대관계를 형성해 왔는데, 노동이 없는 사회는 과연 지속 가능할까? 노동의 사회 통합적 역할을 무엇이 대신할까? 노동이 없다면 나태와 향락, 소비주의를 우려하는 목소리도 큰 데, 그냥 ‘꼰대’의 우려로 치부해도 괜찮을까? 그동안 노동의 위기를 극복하기 위한 대안으로 많이 얘기됐던 ‘자가노동’, ‘시민노동’, ‘사회적 노동’, ‘제3부문’ 등은 왜 별다른 성과를 거두지 못하고 슬그머니 꼬리를 감추었을까? 질문은 꼬리에 꼬리를 물지만 여기서 중단해야겠다.
신정부에 바라는 노동정책이라는 주제로 칼럼을 쓰려다 엉뚱하게 다른 주제로 빠졌다, AI의 도움을 받으려다 그 실력에 놀라 AI와 인간 노동에 대해 잠시 생각해 봤다, 질문은 많고 답은 없다. 많은 논의가 필요할 것이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그동안 노동운동의 핵심 이슈였던 ‘노동해방’의 의미와 노동의 가치에 대한 근본적인 질문이 제기되고 있다는 점이다. 어쩌면 AI가 우리에게 준 최고의 선물은 이것인지 모르겠다. 그동안 잊고 있었던 노동의 근본적인 문제를 고민하고 새로운 ‘인간적인’ 노동사회를 설계하라는 메시지를 던져주고 있다는 것 말이다.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