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재명 정부 노동 국정과제, 희망과 우려 사이에서
이재명 정부가 향후 5년을 이끌어갈 국정과제를 발표했다. 그 중에서도 노동 분야 국정과제는 한국 노동체제의 전환을 예고할만큼 굵직한 과제들이다. '일하는 모든 사람이 건강하고 안전한 나라', '차별과 배제 없는 일터', '노동존중 실현과 노동기본권 보장' 등 과제 명칭만 봐도 현 정부가 노동문제를 산업정책에 종속된 부속물로 간주하지 않음을 알 수 있다. 그러나 과연 이 원대한 계획들이 현실에서 제대로 작동할 수 있을까? 800만이 넘는다는 제도 밖 노동자들에게 실질적인 변화를 가져다줄 수 있을까?
이번 국정과제는 분명 진보적이다. 노동자 추정제 도입, 5인 미만 사업장 근로기준법 단계적 적용, 노동시간 단축(1700시간), 주 4.5일제 단계적 추진, 단체협약 효력확장제도 도입 등은 그동안 노동계가 줄기차게 요구해온 핵심 의제들이다. 특히 ‘근로자의 날’을 ‘노동절’로 명칭 변경하는 것처럼 상징적이지만 의미 있는 변화도 포함되어 있다. 문제는 이러한 정책들이 과연 재계의 저항과 재정적 제약을 넘어 현실화될 수 있느냐는 점이다.
산업안전, 생명보다 중요한 것은 없다
주목할 만한 것은 75번 과제인 ‘일하는 모든 사람이 건강하고 안전한 나라’다. 2030년까지 사고사망만인율을 OECD 평균 수준인 0.29%로 감축하겠다는 목표는 매우 구체적이고 의욕적이다. 원·하청 통합 안전보건관리체계 구축, 중대재해 반복 발생 기업에 대한 영업정지와 등록 말소까지 가능하도록 한 것은 획기적이다. 특히 노동자의 작업중지권 요건을 완화하고, 이를 행사했다는 이유로 불이익을 주면 형사처벌하겠다는 조항은 현장 노동자들에게 실질적인 힘을 부여할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이미 중대재해처벌법을 둘러싸고 재계가 보여준 격렬한 저항을 생각하면, 이러한 강화 조치들이 순탄하게 진행될지는 의문이다. 산업안전보건본부장을 차관급으로 격상하는 방안도 정부 조직 개편이라는 큰 틀에서 논의되어야 하는 만큼, 실현까지는 상당한 시간이 걸릴 것으로 예상된다.
노동시장 이중구조, 과연 해소될 수 있을까
‘차별과 배제 없는 일터’는 노동시장 이중구조 해소를 정면으로 다루고 있다. 노동자 추정제 도입은 플랫폼 노동자들에게 희소식이다. 노동자성 다툼이 발생했을 때 우선 노동자로 추정하고 사용자가 반증하도록 하는 것은 입증책임의 전환이라는 점에서 늦은감은 있지만 대환영할만한 제도다. 5인 미만 사업장에 대한 근로기준법 단계적 적용도 영세사업장 노동자들에게는 숙원사업이다. 하지만 여기에는 ‘함정’이 있다. ‘단계적 적용’이라는 표현이 그것이다. 직장 내 괴롭힘, 모성보호 등은 우선 적용하지만, 노동시간과 가산수당, 유급휴일 등 재정 부담이 수반되는 조항들은 뒤로 미뤄진다. 영세사업주들의 반발을 의식한 타협안이지만, 정작 노동자들이 가장 절실하게 원하는 것은 임금과 노동시간 관련 보호다.
노동기본권, 선언을 넘어 현실로
94번 과제는 노동기본권 보장을 다룬다. 초기업별 교섭 활성화와 2027년부터 도입계획인 단체협약 효력확장제도는 한국 노사관계의 패러다임을 바꿀 수 있는 중대한 변화다. 기업별 노조 체제의 한계를 극복하고 산업별, 지역별 교섭을 통해 노동조건의 상향 평준화를 이룰 수 있는 제도적 기반이 마련되는 것이다. 그런데 여기서 주목해야 할 점은 시행 시기다. 2027년이면 이재명 정부가 이미 중간을 넘어가는 지점이다. 그때까지 충분한 사회적 합의를 이끌어낼 수 있을까? 경영계는 단체협약 효력확장을 ‘강제적 규제’로 규정하며 반대 입장을 분명히 하고 있다. 마찬가지로 공무원과 교원의 노동기본권 보장도 ‘단체교섭 의제 확대 수준’에 머물러 있어 실질적 변화가 불확실하다.
실현가능성, 정치적 의지가 관건이다
이번 국정과제 실현을 위해서는 총 951건의 법률 제·개정이 필요하다고 한다. 210조 원의 재원도 투입되어야 한다. 넘어야 할 산이 많다. 야당의 반대와 비난은 벌써 시작됐고, 재계와 보수언론의 저항도 만만치 않을 것이다. 사실 가장 우려되는 것은 ‘정부 의지’다. 혹여 노동정책에서 타협과 후퇴의 여지를 남겨둔 것은 아닐까? 실제로 국정과제를 자세히 들여다보면 ‘단계적’, ‘점진적’, ‘사회적 대화를 통한’ 등의 표현이 자주 등장한다. 속도 조절의 필요성은 이해하지만, 자칫 무한정 미뤄질 수 있는 빌미를 제공하는 것은 아닌지 걱정스럽다.
노동조합, 수동적 대응을 넘어서야
이런 상황에서 노동조합의 역할이 그 어느 때보다 중요하다. 단순히 정부 정책을 환영하거나 비판하는 수준을 넘어 적극적인 정책 파트너가 되어야 한다. 특히 사업장 단위를 넘어선 초기업 교섭 역량을 시급히 구축해야 한다. 단체협약 효력확장 제도가 도입되더라도 그것을 활용할 수 있는 조직적 준비가 되어 있지 않다면 무용지물이 될 수밖에 없다. 또한 미조직 노동자들과의 연대를 강화해야 한다. 이번 국정과제의 많은 부분이 플랫폼 노동자, 특수고용노동자, 5인 미만 사업장 노동자 등 전통적인 노조 조직률이 낮은 부문을 대상으로 하고 있다. 이들과 함께 할 수 있는 새로운 조직화 전략과 연대 방안을 모색해야 한다.
진정한 노동존중, 아직 시작도 안 했다
이재명 정부의 노동 국정과제는 분명 진일보한 내용을 담고 있다. 그러나 선언과 현실 사이의 간극은 여전히 크다. 노동자들이 원하는 것은 거창한 청사진이 아니라 당장 내일의 안전과 존엄이다. 임금체불에 시달리지 않고, 산업재해 걱정 없이 일하며, 정당한 대가를 받고 적절한 휴식을 취할 수 있는 평범한 일상 말이다. 정부는 이번 국정과제가 단순한 선거 공약이나 정치적 수사가 아님을 행동으로 증명해야 한다. 재계의 압력에 굴복하지 않고, 경제 위기와 재정 부담을 핑계로 후퇴하지 않는 일관된 추진력이 필요하다. 노동조합도 비판적 지지를 넘어 건설적 파트너십을 구축해야 한다. 그래야만 이번 국정과제에 담긴 노동 개혁이 실현되고 한국 노동체제 전환의 진정한 전기가 될 수 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