홈 > 칼럼 > 칼럼
칼럼
 

경북 문경시 희양상회 북토크 - <평등사회 프로젝트>와 노동정치

김영수 / 금속노조 노동연구원 자문위원장
금속노조연구원   |  

사과농사에 진력을 다 쏟아서일까. 배우고 사유하는 장이 고파오던 참에, 그리 멀지 않은 문경시 가은읍에서 북토크가 열린다는 소식을 접했다. 바쁜 농사 일정을 잠시 뒤로 미루었다. 입을 털고 싶고, 마음을 적시고 싶었다. 2026년 8월 29일, 학계와 노동계에서 불평등 사회의 폐부를 찔러왔던 조돈문(전 민교협 상임의장, 한국비정규노동센터이사장 등) 교수의 북토크가 열리는 가은읍 아자개장터 내 희양상회를 찾았다. 조돈문 교수가 발간한 책은 <평등사회 프로젝트>였다. 북토크는 책의 핵심 내용을 강의 형식으로 소개하고, 참석한 사람들의 다양한 질의응답으로 이루어졌다. 말 그대로 책을 매개로 한 학습광장이었다. 


조돈문 교수는 한국 사회의 이데올로기 전선을 ‘평등 대 불평등’으로 설정하였다. 계급 간의 불평등에서 비롯되는 소득 계층별, 성별, 세대별 격차가 줄어들기는커녕 오히려 늘어나고 있는 한국 사회의 현실에서, 노동자•민중이 어떤 이유에서든 불평등을 수용하는 것 자체부터 불평등 이데올로기가 한국 사회의 헤게모니를 장악한 것으로 바라보고 있었다. 사람들이 아니 노동자들은 ‘평등사회’를 대체로 신뢰하지 않고 꿈조차 꾸지 못하는 ‘불평등 숙명론’이 고개를 빳빳하게 세우는 사회가 되었다. 할아버지가 부자여야 청년이 부자로 산다는 웃지 못할 슬픈 이야기가 청년들의 고개를 숙인다.


불평등 사회를 증명하는 통계가 발표되었다. 2026년 9월 20일, OECD 소득분배통계 및 국내 가계금융복지조사 결과다. 소득재분배율(지니개선율)만 보아도, 한국 사회의 재분배율은 2023년 17.6%, 2024년에는 18.5%로 OECD에 가입한 29개 국가 중 28위에 해당한다. OECD국가의 평균 재분배율이 34.4%인 점을 고려하면, 거의 두 배 가까이 낮은 수준이다. 그리고 상위 소득 20%와 하위 소득 20%를 비교하는 소득5분위 배율에서는 2024년 5.78배이고, 순자산5분위 배율은 7.82배(2025.3.)이다. 상위 20%의 소득이 더 늘고 있다. 소득5분위 배율의 격차가 늘어나고 있다. 


그런데도 한국 사회는 KOSPI지수 10,000시대와 AI만능시대의 열풍이 불고 있다. 자본주의 사회체제의 다양한 문제점들이 다 빨려 들어가 녹아버리는 느낌이다. 불평등 이데올로기를 수용하게 하는 폭풍 같기도 하다. 주식 한 장 없이 지금껏 살고 있다. 그런데 국민 전체가 주식시장의 용광로 속으로 빠져들고 있다는 생각이 떠나지 않는다. 노동자들은 어떨까? 오래전 이야기다. ‘한 자동차 회사의 공장에서 일하던 노동자들의 함성이 회사를 들썩일 때가 있는데, 그때는 바로 특정 주식이 상한가를 칠 때 내지르는 환호성이었다.’ 마치 주식이 소득의 신으로 변신하였다. 주식이 주식시장을 개인의 기준만을 가지고 평가하자는 것이 아니다. 단지 불평등을 넘어서기 위한 노동자•민중의 노력이 오히려 불평등의 덫에 걸리는 것 아닌가 하는 의문의 꼬리표가 목덜미를 잡아챈다. 


조돈문 교수가 쓴 내용 중에서 가장 관심이 가는 부분은 두 지점이었다. 하나는 사람들이 왜 불평등 사회를 선호하는가? 이 질문에 대한 답을 다양한 이론과 통계로 정리하여 소개하였다. 조돈문 교수는 그 이유를 한국 사회를 지배하고 있는 ‘분할통치, 허상, 성장, 풍족, 경쟁, 능력, 서열’에서 찾았다. 그나마 계급 상승이 이루어졌던 예전과 달리, 이제는 계급 상승이 불가능한 사회로 정착되었다는 점을 강조하였다. 다른 하나는 평등사회로 나가기 위한 진보 진영의 대안과 관련된 부분이었다. 한국 사회의 이데올기적 갈등은 불평등과 평등이다. 물론 정의와 부정의의 관계도 존재하지만, 이것도 따지고 보면 불평등과 평등의 대립 관계와 긴밀하게 맞물려 있다. 청년 세대들이 가장 민감하게 받아들이고 있는 지점이다. 그런데도 진보 진영은 불평등의 이데올로기적•정치적 헤게모니를 잡지 못하고 있다. 대안이 없는 것이 아니다. 굳이 대안을 말할 필요는 없다. 우선 전제되어야 할 것들이 있다. 그것은 ‘고립, 양당 구조 고착, 복합 위기에 대한 대응의 분산화’ 등이다.


조돈문 교수는 ‘평등사회를 위한 진보동맹 전략’을 내세웠다. 적정한 제안이다. 책의 표지에서 그리고 있듯이, ‘노동+청년+여성=평등사회, 연대와 상생을 거부하면 공멸이다!’ 그런데 조돈문 교수가 밝혔듯이, 불평등 이데올로기를 수용하는 사회적 힘이 있다. 사람들에게 내면화되었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저항의 수원지가 사라지고 있다. 이재명 정권과 더불어민주당은 ‘국민통합, 국민 모두의 대통령, 국민 분열 국가 폭망’을 내세우면서 승객이 없는 텅 빈 개혁 열차의 속도만 올리고 있다. 입만 열면 개혁이고 통합인데, 정작 물과 기름을 섞어보자는 무모한 시도만이 한국 사회의 지각판을 흔들고 있다. 권력의 달콤한 꿀이 넘쳐흐르는 것일까? 권력의 부패 의혹도 무시한다. 오로지 대통령의 측근 정치만이 판을 친다. 제2기 내각의 장관들을 임명하면서 잘 드러나고 있다. 대통령은 ‘국민의 눈높이’를 말하면서도, 눙치기만 할 뿐 사과를 모른다. 참으로 뻔뻔하다. 정치에 대한 무관심을 극대화하는 것인지? 아니면 자신의 잘못을 정말 모르는 것인지? 알고도 모른 채 하는 것이 정치인지? 하지만 제도 정치의 진면목이 난장판인데도, 노동정치의 존재감은 보이지 않는다. 내 눈에만 보이지 않길 바랄 뿐이다. 


역사적으로 한국 노동정치의 주춧돌은 민주노조운동과 노동운동단체와 진보정치세력이 연대하고 상생하는 노동동맹이었다. 노동동맹은 특정한 정당의 힘으로 작용하기도 했다. 혹은 제도 정치를 압박하는 정치적 투쟁의 견인차였다. 제도와 권력과 무관하게 그 힘의 방향을 좌우하는 이정표와 좌표의 역할을 담당했었다. 그런데 노동동맹이 희미해진 자리를 진보동맹이 메꾸고 있다. 선거가 그 자리를 꿰찼다. ‘진보’의 정체성조차 애매해졌다. 어느 순간부터 대중과 노동자들이 노동동맹에 호응하지 않는단다. 촛불투쟁이나 응원봉 투쟁의 성과를 제도 정치만이 누리는 ‘꿀단지 정치’를 부러워하고 질투하는 것일까. 


필자는 노동정치의 대안을 권력에 대한 통제와 관리에서 찾고 싶다. 제도 정치는 노동정치세력에게 아주 미세한 틈조차 내 주지 않는다. 양당정치만이 제도 정치의 생명력을 유지할 수 있어서다. 이제는 제도 정치와 권력 시스템을 비제도적인 진보동맹이나 노동동맹이 실제로 관리하고 통제할 수 있는 정치적 상상력에서 대안을 찾을 때다. 통제와 관리는 제도 권력만의 리그 안에서 잘 이루어지지 않는다는 점을 활용해야 한다. 정치적 효과도 만만치 않을 것이다. 제도 정치와 비제도 정치의 상호 관계의 매개고리를 권력에 대한 통제와 관리로 설정하면 된다. 정치의 현실을 잘 모르는 헛소리라 해도 좋다. 상상력을 발휘하는 사람들은 헛소리도 참소리로 바꿀 수 있다. 필자는 노동정치의 위상을 헛소리 같은 상상력에서 재정립했으면 하는 마음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