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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동차업종 사내하청 조직화투쟁의 쟁점과 평가

금속노조연구원   |  

자동차업종 사내하청 조직화투쟁의 쟁점과 평가


: 현대 및 기아차를 중심으로


                   김보성(서울대 사회학과 박사과정 수료)


1. 들어가며


자동차업종의 사내하청 노동자의 투쟁이 본격화된 시기는 97년 IMF 경제위기 이후였다. 97년의 경제위기 직전 기아차의 경영 위기 속에서 아시아 자동차 사내하청 노동자 투쟁이 시작되었고, 이후 2001년 광주 캐리어, 2003년 현대차 아산공장 사내하청 노동자의 노조 조직화를 필두로 자동차업종을 중심으로 대공장내 사내하청 노동자의 노조 결성이 활발하게 전개되었다. 이 과정에서 핵심은 상급단위인 금속노조가 조율, 주도한 불법파견 정규직화투쟁이었다. 하지만 2006년 이후 불파투쟁이 법·제도적으로 봉쇄되면서 기나긴 동면의 밤을 보내고 난 후 2010년 7월 22일 대법원의 파기환송심, 연이은 23일간 현대차 1공장 점거농성을 통해 사내하청노동자의 불법파견투쟁은 재점화되었고, 현대차자본의 무자비한 탄압과 정부의 책임방기로 현재에 까지 이르고 있다. 이 글은 97년 IMF 경제위기 이후 본격화한 자동차업종 사내하청 노동자의 저항과 조직화 과정을 간략히 살펴보면서 그 성과와 더불어 문제점, 그리고 내부적 쟁점을 도출하여 향후 조직화 전략을 새롭게 하는데 필요한 고민거리를 나누는데 목적이 있다. 기초 자료로 삼고자 한다. 

2. 사내하청 노동 실태


1) 규모


자동차 업종에서 사내하청 노동력은 1980년대 초반부터 활용되기 시작했다. 현대자동차의 경우, 1980년대 초에 일본 미츠비시 자동차와의 기술협력을 통해 대량생산체제를 구축하였는데, 이것이 작업장 내에 기업의 경계를 달리하는 이질적 노동자들이 확산되는 계기로 작용하였다. 특히 1982년에는 ALC(assembly line control) 시스템이 완성되어 부품 서열공급 체계의 구축이 필요했는데, 이때부터 전속 하청업체 노동자들이 작업장 내에서 부품공급 업무를 담당하기 시작했다(손정순, 2009: 100-101). 


현대자동차에서 사내하청 노동력 활용이 본격적으로 증가하기 시작한 것은 1990년대에 들어서면서부터이다. 기록에 따르면 현대자동차 울산공장에는 ‘90년에 2,788명, ’95년에 3,715명, ‘96년에 4,700명의 사내하청 노동자들이 존재했으며, 대략 이 시기부터 이들은 청소‧경비‧포장‧운송‧설비 보수 등의 간접부문 업무를 넘어서 조립라인 업무에까지 투입되기 시작했다(손정순, 2009: 150). 2000년대에 들어서도 사내하청 노동자 규모 증가세는 계속되었다. 특히 1998년 이후 사내하청 인원이 급증한 이유는 1998년 정규직 노동자들에 대한 대규모 구조조정 직후 시장상황이 회복되었으나, 새로 생겨난 일자리에 정규직이 아닌 사내협력업체 노동자들이 배치되었기 때문이다. 또한 단체교섭 수준에서의 16.9% 합의와 작업장 수준에서의 M/H 협상과정에서의 하청투입 허용 역시 사내하청 노동자 규모 증가의 요인으로 작용했다. 이에 따라 1차하청의 직영대비 비율은 1998년 16.9%에서 2004년 33%까지 증가하였다.

그러나 2004년 이후 사내하청 인원 추이는 감소세로 돌아섰다. 그 이유는 우선 2004년 정규직노조와 비정규노조의 불법파견 집단진정 제출 및 노동부의 불법파견 판정을 계기로 불법파견이 공장 내에서 뿐만 아니라 사회적으로도 쟁점이 되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또한 모듈화로 대표되는 기술 및 생산방식의 변화로 인해 공정이 축소되어 고용조정이 이루어지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예상할 수 있다시피 사내하청 노동자들은 고용조정의 1순이 대상이 되었다. 이에 따라 1차하청의 규모는 지속적으로 축소되었다. 2010년 현재 현대자동차에는 울산공장에 5,804명, 전주공장에 905명, 아산공장에 878명, 총 7587명의 사내하청 노동자들이 있는 것으로 집계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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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편, 자동차 업종 평균 직영대비 1차하청 비율은 18% 정도인 것으로 보고된다. [표3]에 나타나듯, 자동차 업종의 사내하청 비율은 조선, 철강, 정보통신 업종에 비해 상대적으로 낮은 것으로 확인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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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이한 점은 전반적으로 사내하도급 노동자들의 절대 수치가 늘어가고 있다는 보고(한국노동연구원, 2007: 13)와는 달리, 자동차업종에서는 현대자동차의 사례에서와 같이 최근 몇 년 들어 사내하청 노동자들의 수가 현상 유지되거나 감소하는 현상이 관찰된다는 것이다. 이는 2003년 이후 자동차 사내하청 노동조합의 수립으로 사내하청 노동이 증가하였으며 불법파견 문제가 사회적 쟁점으로 떠올라 원청사가 사내하청 노동을 대거 활용할 유인이 상대적으로 줄어들었기 때문인 것으로 보인다. 또한 좀 더 넓은 시각에서 보자면, 이러한 상황이 원청사로 하여금 공정의 편성효율을 증진시켜 노동절약적‧숙련대체적인 생산방식을 구축하고자 하는 한국 자동차 산업의 기존의 생산전략을 더욱 강화시켰을 것으로 보인다. 

2) 임금 및 노동조건


먼저, 상대적으로 최근에 자동차산업 생산위계별 업체들의 임금수준 및 임금결정 메커니즘을 분석한 이병훈‧유형근(2009)의 논문을 살펴보기로 하자. 5개업체 모두 임금체계의 기본구조는 ‘기본급(시급제)+수당+상여금’으로 구성되어 있다. 기본급의 경우, A사에만 호봉제가 도입되어 협약임금 인상에 더하여 매년 일정액의 호봉승급분이 자동인상되며, 나머지 업체들에서는 기본급 인상이 임금교섭에만 의존한다. 고졸 군필 생산직의 초임은 A사가 1,158천원, B사가 979천원, D사가 969천원, E사가 907천원으로, 생산위계별 초임수준의 차이를 확인할 수 있다. 수당의 경우, A사가 40여개, B사가 6개, C사가 8개, D사가 3개, W사가 7개이다. 고정상여금의 경우, A가 ‘통상임금+기타’의 750%, B사가 통상임금의 700%, C사가 통상임금의 750%, D사가 기본급의 600%, E사가 통상임금의 600%이다. 변동상여금의 경우, A사에서는 2008년 임금교섭에서 300%의 성과급과 타결일시금 400만원으로 최종 합의되었지만, D사에서는 명절일시금을 제외하고 성과급이 전혀 주어지지 않았다. 5개 사례업체들은 모두 금속노조의 지부 또는 지회로 조직되어 있지만, 임금격차가 상당히 크며 임금체계의 구성도 상이함을 확인할 수 있다(이병훈‧유형근, 2009: 9). 


또한 임금결정 메커니즘의 경우, A사는 노사가 각각 자체적으로 희망가격을 산출하고 단체교섭 과정에서의 협상-조율을 통해 최종가격을 결정한다. 여기서 특징은, 최종가격 결정과정에서 여타 완성차업체들의 임금수준이 별로 고려되지 않으며, 최종가격이 타업체들에 미칠 영향 또한 크게 의식되지 않는다는 것이다. 이는 완성차업체 A사의 임금결정이 ‘탈지역화(de-localization)'되어 있음을 의미하는 것으로, 시장지배적 기업으로서의 A사의 위상을 엿볼 수 있는 대목이라 하겠다. B사와 C사의 임금결정에서 드러나는 가장 큰 특징은 노사가 모두 지역노동시장의 영향을 많이 받는다는 것이다. B사와 C사를 포함한 지역노동시장의 부품업체들은 상호간 패턴교섭을 통해 임금수준을 결정한다. 이는, A사가 설립한 모듈업체의 등장으로 인해 시장을 잠식당하거나 단가인하(Cost Reduction, CR) 압박을 받는 등 공통의 어려움 속에서 개별화된 임금교섭이 불러올 수 있는 피해를 최소화하기 위해 자체적으로 고안된 조율된 교섭(coordinated bargaining) 관행으로 해석될 수 있다. 또한 D사의 생산직은 단순기능직과 숙련기술직으로 구분되는데, 단순기능직은 동일업종 노동시장에서의 임금수준의 영향을 많이 받고, 숙련기술직은 전국적 차원에서의 직종노동시장에서의 임금수준의 영향을 많이 받는 것으로 나타났다. 마지막으로 사내하청업체에 해당하는 E사는 임금결정에서 업체 재량권을 갖지 못한 채 A사와 맺는 하도급 계약의 내용에 따라 임금수준을 결정하는 것으로 확인되었다. E사에 비정규직 노조 조합원이 18명 존재하기는 하나, 노조의 교섭력은 취약한 상황이다. 노조의 조직률은 10% 정도에 불과하고, 그간 원청업체와의 직접교섭이나 업체들간의 집단교섭도 성사시키지 못했으며, 협상 내용은 정규직 노조의 교섭에 의해 좌우되고 있다. 2003년 이후 정규직 노조의 대리교섭 효과로 임금이 인상되면서 이직률이 낮아지고 근속이 상승하는 등 일정한 정도의 ’내부노동시장화‘가 진행되고 있지만, 이것이 자체적인 힘에 근거하고 있지 않다는 것이다. 더불어 정규직 노조라는 외부효과의 또 하나의 측면은, 사내도급업체들간의 임금 및 근로조건의 평준화가 이루어졌다는 점이다. 이는 사내하청 노동자들 사이에 조합활동에 참여하는 등 개인적인 노력을 기울이지 않고도 평준화된 임금 및 근로조건의 혜택을 누릴 수 있는 무임승차가 확산되는 조건으로 작용한다(이병훈‧유형근, 2009: 10-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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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편, 조성재(2006)와 이상호(2010)는 현대자동차 울산공장 직영노동자와 사내하청 노동자, 1‧2차 부품사 직영노동자들의 임금수준을 비교‧분석하며, 이들의 임금수준이 대체로 생산위계-하도급지위에 따라 위계적으로 나타남을 보여준 바 있다. 즉, 현대자동차 직영노동자, 사내하청 노동자, 1차부품사 직영노동자, 2차부품사 직영노동자 순으로 임금수준이 높게 나타난다는 것이다. 


이러한 임금수준의 위계화는 1차하청을 중심으로 정규직화 투쟁에 집중해온 그간의 사내하청 운동의 의도치 않은 결과로 보인다. 2003년 이후 사내하청 운동은 대기업 노조를 중심으로 불법파견 정규직화 투쟁 및 원청 사용자성 인정 투쟁을 조직해왔다. 이 과정에서 사내하청 노동자들이 대규모로 정규직화된다든지 원청 사용자성이 인정되어 노조가 안정되고 교섭이 정례화된다든지 하는 성과는 나타나지 않았지만, 1차하청 노동자들을 중심으로 임금 및 노동조건은 꾸준히 개선되어 왔다. 문제는 이러한 임금인상과 노동조건 개선의 성과가 2‧3차 하청노동자들이나 외부 부품업체 노동자들에게 파급되지 않았다는 점이다. 따라서 투쟁 이후 자동차산업 생산위계에 따른 임금위계화와 분단은 보다 강화되는 결과가 초래되었다.


다음으로 근로시간 및 기업복지를 살펴보자. 사내하청 노동자들은 원청업체 노동자들에 비해 근로시간은 더 길고 휴일‧휴가는 더 짧은 것을 알 수 있다. 또한 기업복지 차원에서도 원‧하청간에는 상당한 차이가 있는 것을 확인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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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사내하청 노동의 증가 기제: 모듈화를 중심으로


‘97년 이후부터 2000년대 중반까지 자동차 업종 내에서 사내하청 노동이 왜 증가했는지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시장상황, 생산방식, 노사관계에 있어서의 변화들을 모두 포괄적으로 이해해야 할 것이다. 그러나 여기서는 비정규직 증가의 핵심기제 중 하나로 작동하고 있는 모듈화 중심으로 한 생산방식의 변화를 집중적으로 살펴보기로 한다

 


 [그림1] 한국 자동차 상품연쇄 구조변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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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김철식(2009a)에서 인용.

 

주지하다시피 ‘97년 이후 한국 자동차산업의 생산방식은 크게 변화해왔다. 기존의 한국 자동차 상품연쇄(commodity chain)는 ’부품기업→완성차기업→판매‧서비스기업‘의 기업간 분업구조의 형태를 띠고 있었다. 그러나 ’97년 이후, 현대자동차와 기아자동차를 중심으로 한 한국의 완성차 대기업들은 모듈화(modularization)를 통해 생산기능의 상당부분을 외부화하고 오히려 기존에 분리되어 있던 판매‧서비스 기능을 통합해나가기 시작했다. 핵심활동 영역을 생산에서 기획, 디자인 마케팅 등 서비스로 옮겨간 것이다(김철식, 2009a, 2009b). 이는, 원청기업은 시장 창출, 진입, 방어와 서비스 제공에 집중하고 실제 생산은 국제적으로 활동하는 턴키 서플라이어(turn-key supplier)가 담당하는 모듈생산네트워크(modular production network)가 출현하고 있다는 Sturgeon(2002)의 주장과 일맥상통한다.


한국 자동차산업 상품연쇄 구조변화에서 핵심을 이루고 있는 것은 모듈화와 플랫폼 통합이다. 모듈화란, ‘여러 가지 부품들을 부위별로 조립된 부품의 집합체로 만드는 일’이다(전국금속노동조합, 2003: 47). 이는 작업공정의 핵심기능을 표준화하여 필요한 부분을 미리 조립한 후 납품하는 것으로, 이러한 과정이 확대되면 될수록 완성차의 최종 조립과정은 매우 단순화된다고 할 수 있다(조형제 외, 2009: 60). 또한 플랫폼 통합이란, ‘하나의 플랫폼의 기본 설계를 바탕으로 다양한 차종 및 모델을 설계, 개발하는 것’으로, 생산 비용과 제품개발 비용을 절감하면서도 다양한 차종과 모델들을 생산할 수 있도록 하는 하나의 전략을 의미한다. 모듈화와 플랫폼 통합은 서로 다른 전략이며 이 둘이 반드시 결합될 필요는 없다. 그러나 대체로 플랫폼 통합은 모듈화를 촉진하는 효과를 지니며, 현대자동차를 비롯한 한국의 완성차 기업들은 이 둘을 동시에 추진하는 경향을 보인다(김철식, 2009a: 50; 전국금속노동조합, 2003: 34; 이홍일, 2008: 15)

  

모듈화는 한국 자동차산업 생산방식과 노동과정, 조직간 관계, 고용관계와 노사관계에 근본적인 변화를 가져왔다. 우선 생산방식와 노동과정 차원에서, 첫째, 모듈화는 완성차 및 모듈조립공장에서 유연표준화(flexible standardization) 대량생산 시스템을 구축하였다. 유연표준화란 전문성이나 숙련이 아니라 표준화의 진전을 통한 유연성의 확보를 의미한다. 제품의 측면에서 본다면, 제품의 기본구조를 표준화한 상태에서 외적인 면에 약간의 차별성만을 가미함으로써 상황변화에 맞는 다양한 제품들을 낮은 개발비용으로 신속하고 지속적으로 출시해내는 방식을 말한다. 이때 기본구조의 표준화에 따라 노동과정의 표준화와 자동화가 진전됨으로써 미숙련 저임금 노동을 활용한 비용절감 역시 가능해진다. 또한 노동과정의 표준화로 광범위한 외주화가 가능해지고, 이를 통해 물량을 수요변화에 맞추어 유연하게 조정함으로써 경기변동의 위험을 외부로 전가할 수도 있게 된다(김철식, 2009a: 69-71). 


둘째, 모듈화는 생산과 납품을 동기화(synchronization)하였다. 동기생산방식(JIS, just in sequence)은 서열부품업체를 중심으로 ‘납품’을 동기화하던 적기생산방식(JIT, just in time)을 넘어서 ‘생산과 납품을 모두 동기화’한다. 이는 완성차업체의 생산순서와 모듈업체 혹은 부품업체의 생산순서를 일치시킴으로써 생산 및 납품 대기시간을 획기적으로 줄이고 재고를 ‘영’에 가깝게 맞춘다. 이러한 동기생산방식은 완성차업체와 모듈업체, 부품업체간의 원활한 정보유통을 전제한다(이홍일, 2008: 20-21). 



다음으로, 조직간 관계 차원에서, 모듈화는 한국 자동차 대기업의 상품연쇄 구조에 대한 지배를 강화시켰으며 하위 부품업체들의 자동차 대기업에 대한 종속을 심화시켰다. 이와 관련하여, 김철식은 한국 자동차 산업 복수노자의 전략적 선택과 상호작용을 분석한 바 있다. 그에 따르면, 완성차 기업의 하위 부품업체에 대한 관리전략은 포섭적 통제(inclusive control)에서 배제적 통제(exclusive control)로 변화하였으며, 이에 따라 조직간 관계에서 납품단가 인하를 통한 부등가교환이 제도화되었다. 즉, 하위 부품업체로의 비용 및 위험 전가를 바탕으로 한 완성차 기업의 이익극대화가 전면화되고 있는 것이다. 


한편, 이에 대한 하위 부품업체들은 크게 세 가지의 전략으로 대응한다. 첫 번째는 완성차 기업에 대한 의존도를 축소하려는 ‘독립 전략’, 두 번째는 완성차 기업과 보다 긴밀한 관계를 형성하기 위해 상품연쇄상의 상위 계열로 이동하려는 ‘상향이동 전략’, 세 번째는 완성차 기업이 부과하는 비용절감 압력을 내부 노동이나 보다 하위 계열에 있는 기업에 전가하려는 ‘비용재전가 전략’이다. 그러나 독립 전략과 상향이동 전략은 자동차 상품연쇄 구조를 사실상 완성차 기업이 장악하고 있는 현실에 가로막혀 실패하며, 비용재전가 전략만이 하위 부품업체가 활용할 수 있는 유일한 현실적 대안으로 떠오르게 된다(김철식, 2009a: 97-114). 주목해야 할 점은, ‘97년 이후 한국 완성차 대기업이 모듈화를 통해 지속적으로 생산을 외부화해 왔지만, 이것이 하위 부품생산 체계에 대한 지배를 철회하는 과정은 아니었다는 점이다. 오히려 지배를 재구조화하는 과정이었다고 보는 것이 옳을 것이다.


마지막으로 고용관계와 노사관계의 차원에서, 모듈화는 비정규직을 양산하고 정규직과 비정규직 모두의 노동조건을 악화시키며, 노동자들의 단결을 억압한다(김철식, 2009a: 127-150; 이홍일, 2008: 23-26; 전국금속노동조합, 2007: 232-235; 전국금속산업노동조합연맹, 2006: 115-125). 현재 한국 자동차업종에서 모듈화는 완성차업체의 모듈제작의 외주화와 이에 따른 완성차업체 내에서의 작업 및 인력조정의 양상으로 나타나고 있다. 이는 두 가지 차원에서 문제를 야기한다. 첫째, 이러한 모듈화는 모듈업체의 고용을 유연화시키고 노동강도를 강화한다. 완성차 업체의 모듈제작 외주화 주요 동기 자체가 생산비용 절감이기 때문에, 모듈업체는 단가인하를 위한 노동비용 절감을 강제 받을 수밖에 없다. 이는 모듈업체에서 극단적인 비정규직의 양산과 노동강도의 강화를 초래한다. 


실제로 현대모비스를 통해 이러한 사실을 확인할 수 있다. 1998년 이후 현대자동차는 모듈화를 본격적으로 추진하기 시작했으며, 이를 위해 현대모비스를 설립하고 부품조달체제를 재구축하였다. 현대모비스는 공급사슬관리, 기업자원관리 등을 통해 부품생산과 납품을 총괄적으로 관리하는 역할을 담당한다. 따라서 수직적으로 탈 통합된 자동차 생산 네트워크에서, 전속적 관계를 특징으로 하는 완성차 대기업-대형 모듈업체(현대차-현대모비스)의 생산연합은 시스템적 통제의 핵심을 이룬다. 그리고 완성차 업체의 선택에서 제외된 대다수 부품업체들은 전체 생산에서 주변적 기능을 담당한다. 1998년 이후 현대모비스는 조직체계의 기술적 핵심을 내부화하고 위험을 외부화하는 전략을 구사하며 비약적으로 발전했다. 현대모비스는 연구 및 기술 투자에 집중하는 대신 1차 부품업체들의 최종 조립라인을 인수‧합병하여 이들 기업을 사업부 형태로 내부화하였으며, 생산직 전원을 간접고용 비정규직으로 채용하여 비용절감을 도모하였다(강민형, 2007: 21-24; 이종탁, 2007: 119-122). 모비스의 생산공정은 작업공간이 협소하고 작업속도가 매우 빠르기로 악명 높다. 이러한 상황에서 노동자들은 비정규직이라는 불안정한 고용상태와 피로 및 뇌심혈관계‧근골격계 질환을 수반하는 살인적인 노동강도 속에서 고통 받고 있다. 


둘째, 모듈화는 완성차업체 내에서도 작업 및 인력조정으로 인한 노동유연화와 노동강도 강화를 야기한다. 모듈화가 진행되면 완성차업체에서는 모듈화로 빠져나간 공정으로 인한 작업 및 인력 재배치가 불가피해진다. 이러한 과정은 UPH 조정과 함께 이루어지는 것이 일반적인데, 사측의 UPH 상승 요구는 정규직노조 대의원과의 M/H 협상을 통해 노동력 전환배치 및 사내하청 노동자 추가 투입으로 귀결되는 경우가 많았다(전국금속산업노동조합연맹‧한국비정규노동센터). 그러나 모듈화가 더욱 진전되어 보다 극단적인 고용조정이 이루어지는 상황이 벌어진다면 이번에 사내하청은 고용조정의 1순위 대상이 될 것임이 불을 보듯 뻔하다. 


살펴보았듯 모듈화는 생산방식과 노동과정, 조직간 관계, 고용관계와 노사관계에 근본적인 변화를 가져오며, 비정규직의 확산과 사내하청 노동력 규모의 변동은 이러한 변화의 맥락 속에서 이해될 필요가 있다.

3. 사내하청 조직화 실태


1) 조직화의 시기 구분


자동차업종 사내하청 노동운동 흐름은 크게 세 시기로 구분될 수 있다. 첫 번째 시기는 완성차 업체들에서 사내하청 노동자들이 조직되기 시작한 03년경부터 불법파견 정규직화 투쟁이 대규모로 전개된 06년까지이다. 두 번째 시기는 투쟁이 소강기로 접어듦과 동시에 1사1조직으로의 전환 시도가 이루어진 07년부터 09년까지의 시기이다. 세 번째 시기는 대법원의 현대차 불법파견 판정을 계기로 현대자동차 울산공장에서 불법파견 정규직화 투쟁이 재조직되면서 사내하청 노동운동이 짧은 상승세를 타기 시작한 2010년부터 다시금 운동이 소강상태에 접어든 현재까지이다. 관련하여 2010년 불법파견 정규직화 투쟁은 2005~6년의 투쟁처럼 많은 완성차 공장들에서 동시다발적으로 전개되지 않았으므로 세 번째 시기를 독립된 시기로 구분할 필요가 있겠는가라는 의문이 제기될 수도 있겠다. 그러나 여기서는 2010년 투쟁의 의미와 중요성, 사회적 파급력을 고려하여 2010년부터 현재까지를 독립된 시기로 상정하기로 한다. 

① 1시기(초기조직화~‘06년): 사내하청 노동조합의 건설과 1차 불법파견 정규직화 투쟁


이 시기에는 주요 완성차 공장들에서 사내하청 노동자들의 조직화 및 노조건설이 이루어지고 금속산업연맹 및 금속노조, 단위노조들 차원에서 1차 불법파견 정규직화 투쟁이 전개되었다. 릴레이 진정투쟁으로 노동부로부터 불법파견 판정을 받은 자동차 비정규직 노동조합들은 단위현장에서 불법파견 정규직화 투쟁을 조직하기 시작하였으며, 이 투쟁은 사내하청 노동자들의 큰 호응을 얻으며 확산되어갔다. 


그러나 노동부의 불법파견 판정과 시정명령은 실질적인 구속력을 발휘할 수 없었으며, 원청 사용자들 역시 불법파견을 인정하지 않은 채 업무 재조직화를 통해 진성도급으로의 탈출구를 찾아나갔다. 이와 더불어 사내하청 노동조합에 대한 원청 사용자의 탄압이 강화되자, 불법파견 정규직화 투쟁은 약화‧해체되기 시작했다. 물론 금속노조 경주지부와 타타대우상용차에서는 단계적 정규직화라는 성과를 낳기도 했지만, 대부분의 사업장에서 투쟁주체들은 해고되어 현장 밖으로 밀려났으며 대중투쟁 동력 역시 유실되었다. 

② 2시기(‘07년~’09년): 투쟁 소강과 1사1조직으로의 전환 시도


이 시기에 들어 대부분의 사업장에서는 뚜렷한 대중투쟁이 형성되지 않는 가운데 노조활동이 소강기로 접어드는 상황이 전개된다. 


한편, 금속노조는 원하청연대회의를 통해 비정규직노조나 지회를 지원하던 기존의 사내하청 조직화 방식의 한계를 평가하며, 2006년 12월 통합대의원대회에서 1사1조직 조직편제 원칙을 확정하는 규약개정을 단행하였다. 이후 2007년 10월 중앙위원회에서 지회모범규칙을 개정하고 11월 대의원대회에서 미조직 비정규직 조직화 사업을 3대 중심사업 중 하나로 확정하면서 2008년부터 1사1조직 비정규직 조직화 사업을 집중적으로 펼쳐나가기 시작했다. 


이러한 흐름 속에서 자동차업종 내에서는 2008년 4월에 기아자동차지부가 6월에는 타타대우상용차지회가 1사1조직으로의 정규직‧비정규직 조직통합을 이루어냈다. 그러나 현대자동차지부에서는 2008년 10월 1사1조직을 위한 규칙개정안이 세 번째로 부결되었으며 기아자동차지부에서도 1사1조직으로의 전환은 이루어냈으나 그 과정에서 정규직지부와 비정규직지회간의 갈등이 극대화되어 1사1조직으로의 사내하청 조직화 전략은 한계와 문제점을 드러내기도 했다.

③ 3시기(‘10년~현재): 현대자동차 사내하청 노동자들의 2차 불법파견 정규직화 투쟁과 불법파견 문제의 재쟁점화


이 시기에는 2010년 7월 현대자동차 사내하청 노동자에 대한 대법원의 불법파견 판결을 계기로 울산공장에서 불법파견 정규직화 투쟁이 다시금 격렬하게 타올랐다. 투쟁은 11월 15일 기습적으로 시작되어 25일간 지속된 1공장 점거투쟁으로 정점에 올랐다 계획한 2차 파업이 사실상 불발로 그치면서 점차 사그라졌다. 울산공장 사내하청 노동자들의 투쟁은 2004년~2005년 시기처럼 다른 사업장으로도 퍼져나가 동시다발적인 투쟁으로 확산되지는 않았지만 노동계뿐만 아니라 사회의 각계각층으로부터 지지와 호응을 얻으며 사내하청 노동자들의 실태와 불법파견 문제를 사회적인 이슈로 만드는 데 기여했다. 

2) 시기별 조직화의 진행양상과 실태(조합 및 조합원 수) 및 특징


① 현대자동차 비정규직 노조 (울산)


가. 1시기(‘03년~’06년): 노조건설 ~ 1차 불법파견 정규직화/독자임단협 쟁취 투쟁


2003년은 사내하청 노동자들의 울분과 설움이 터져 나오면서 대다수 자동차대공장들에서 비정규직 노동운동이 시작된 해였다. 현대자동차 울산공장의 경우에도 2003년 5월 1일 한 노동자가 ‘현대자동차 비정규직 인간선언’이라는 유인물을 뿌리면서 비정규직 노동자 처우개선과 단결을 촉구하는 사건이 벌어지면서 분위기가 고조되기 시작했다. ‘인간선언’ 다음 날인 5월 2일에 100여명의 사내하청 노동자들이 모여 ‘현대자동차 비정규직투쟁위원회’가 결성하였으며, 비투위 결성 2달 만인 7월 8일에 127명의 발기인들이 모여 ‘현대자동차 비정규직노동조합’ 설립총회를 개최하였다. 설립총회 직후 비정규직노조는 정규직 활동가들의 도움을 얻어 조합원 가입을 받기 시작하였는데, 다음날까지 약 500여명의 노동자들을 조합원으로 가입시키는 쾌거를 이루기도 했다. 그러나 이러한 가입 추세는 7월 9일 현대자동차 노동조합 중앙쟁대위 소식지에 비정규직 독자노조 설립 제고를 요구하는 현자노조 상무집행위원 명의의 입장글이 실린 이후 중단되었다.


설립총회 직후에 비정규직노조는 이렇다 할 활동을 전개하지 못했다. 특히 2003년 말 열사투쟁 국면에서 열린 노동자대회에서 다수의 활동가들이 경찰과의 충돌로 구속‧수배됨으로써 비정규직노조의 활동은 더욱 위축될 수밖에 없었다. 이러한 상황에서 비정규직노조는 2004년 노동부의 불법파견 판정을 계기로 불법파견 정규직화 투쟁을 대대적으로 전개해나감으로써 비정규직 노동자들에 대한 조직화의 물꼬를 새롭게 트고자 했다. 

이에 비정규직노조는 2005년 1월 18일부터 5공장을 중심으로 비정규직 정규직화와 직접고용을 통한 불파문제 해결을 요구하며 농성투쟁을 벌이는 한편, 2005년 1월 24일 현자노조 대의원대회에서 공식발족한 원하청연대회의에 참여함으로써 불파문제 공동대응을 모색해나가기로 했다. 공동결정‧공동투쟁‧공동책임이라는 이른바 3원칙을 두고 양 노조 사이에 갈등이 있기는 했으나, 원하청연대회의가 전개한 일명 ‘부흥회’라 불리는 비정규직 조직화 사업을 통해 비정규노조는 조합원 수를 6월 말 현재 1,800여명까지 끌어올릴 수 있었다. 


그러나 이후에도 현자노조와 비정규직노조는 공동투쟁의 과정에서 끊임없는 갈등을 겪었으며, 이러한 갈등은 9월 4일 자결한 류기혁 열사 관련 논쟁을 거치며 극대화되었다. 결국 현자노조는 9월 8일 비정규직 처우개선안이 포함된 2005년 임단협안에 잠정합의함으로써 진행되던 공동투쟁에 사실상 종지부를 찍었으며, 이후 9월 27일 비정규직노조 1기 집행부는 투쟁패배에 대한 책임을 지고 사퇴하였다. 이러한 과정에서 비정규직 투쟁동력은 소진되고 조합원 수 역시 급격히 감소했다. 


한편 2005년 9월에 들어선 2기 집행부는 ‘비정규직 독자임단투와 집단교섭 쟁취’을 2006년 임단투 방침으로 확정하였으나, 현대자동차가 참여하는 집단교섭을 성사시킬 수 없어 업체별 교섭과 투쟁으로 계획을 전환하여 투쟁을 전개할 수밖에 없었다. 투쟁 와중에 현자노조 2006년 임단협안 잠정합의 직후인 8월 8일 업체단이 사내하청 노동자 임금인상 및 성과금 지급을 일괄 발표하였으나, 비정규직노조는 투쟁을 이어갔다. 이에 현자노조는 교섭을 추진하였으며, 결국 원청노사와 비정규직노조 3자(울산, 아산, 전주)가 참여하는 교섭에서 잠정합의안이 도출되었다. 

이렇게 도출된 잠정합의안을 놓고 비정규직노조 내부에서는 논란이 벌어졌으며, 결국 2기 위원장 사퇴와 비대위 체계로 전환 및 재투쟁 결의, 투쟁 철회 및 2기집행부 사퇴라는 일대 혼란이 전개된다. 이러한 과정을 거치며 불파투쟁 최고조기 때 2,000여명까지 올라갔던 조합원 수는 2006년 9월 말 현재 1,000여명 수준으로 떨어지게 된다. 


나. 2시기(‘07년~’09년): 노조활동 침체 및 1사1노조로의 전환 실패


05년 불파투쟁 및 06년 독자임단투가 실패로 끝나면서 많은 활동가들이 해고되고 2007년 1월 검찰이 현대자동차 불법파견 무혐의 처분을 내리고 불기소 결정을 밝힘에 따라 많은 조합원들이 노조를 떠나기 시작했다. 게다가 비정규직노조가 집행력 및 대중투쟁 동력이 취약해져 독자임단투를 전개하거나 집단교섭을 성사시킬 수 없게 되자, 2007년부터는 현자노조가 비정규직노조의 임단협을 중재하는 대리교섭 문제가 불거지기 시작했다. 이러한 상황에서 조합원 수는 꾸준히 줄어 최하 600명 선까지 하락했으며 노조활동은 침체상태에 빠져들게 되었다. 

이러한 현실 속에서 비정규직노조는 상황을 돌파해나가기 위한 방향의 일환으로 현자노조와의 조직통합을 기대하고 현자노조를 상대로 노조 규칙개정을 요구하는 1사1조직 운동을 전개해나가기 시작했다. 그러나 1사1조직 방침을 담은 규칙개정안은 2007년 1월 및 6월, 2008년 10월에 열린 현자노조 임시대의원대대에서 모두 부결되었다. 


다. 3시기(‘10년~현재): 2차 불법파견 정규직화 투쟁


해체되었던 현장투쟁 동력은 2010년 7월 22일에 대법원에서 현대자동차 불법파견 판정이 난 이후 다시 살아나기 시작했다. 투쟁은 11월 15일에 시작되어 25일간 지속된 1공장 점거농성과 파업으로 정점에 올랐으며, 조합원 수 역시 2010년 11월 8일 현재 1,950명까지 급격하게 증가했다. 점거농성과 파업투쟁 과정에서 비정규직노조는 핵심요구, 투쟁의 수위와 방식, 교섭방식(—이른바 ‘선농성해제 후교섭’이냐, ‘선교섭 후농성해제’냐 라는—)을 놓고 현자노조와 첨예한 갈등을 빚었으며, 비정규직 파업투쟁을 지원하기 위한 총파업 돌입 여부를 묻는 현자노조의 쟁의행위찬반투표 다음날인 11월 9일 결국 농성해제와 교섭참여를 결정하면서 25일간의 투쟁을 마무리했다. 


2000여명에 달하는 조합원 수는 1공장 점거파업이 마무리되고 2차 파업투쟁이 논의되던 2011년 초까지만 해도 높은 수준으로 이어졌으나, 2차 투쟁이 사실상 불발로 그치고 투쟁을 이끌던 3기 집행부가 공금유용 논란으로 사퇴한 이후 새로운 집행부가 빠르게 선출되지 않는 등 문제가 지속되면서 점차 줄어들어 2011년 7월 현재 약 600명에서 800명 정도의 노동자들이 조합원 신분을 유지하고 있는 것으로 추정된다. 

② 기아자동차 비정규직 지회 (화성)


가. 1시기(‘03년~’06년): 노조건설과 ‘05, ’06 임단투


기아자동차에서도 비정규직 조직화는 2003년도부터 시작되었다. 다만 사업장 자체의 특성에 따라 활동은 불법파견 정규직화 투쟁보다는 업체투쟁과 임단투에 보다 집중한 양상으로 전개되었다. 


먼저 4월에 비정규직 활동가 4명과 정규직 활동가 2명이 ‘노동해방을 위한 기아자동차 비정규직 현장투쟁단’을 결성하고, 업체별 회원조직화에 돌입했다. 회원조직화의 기제는 고용 및 노동조건과 관련된 다양한 업체별 사안들을 둘러싼 업체투쟁이었다. 2003년에는 기광, 성원실업, 신성물류에서, 2004년에는 세화실업, 보성 등에서 업체투쟁이 조직되었다. 이러한 투쟁과정을 통해 현장투쟁단은 빠른 속도로 노동자들을 조직화해나갈 수 있었는데, 노동조합 결성 직전 현투단은 이미 5개 업체 350여명의 노동자들을 회원으로 보유하고 있었다. 

2005년 현장투쟁단은 ‘투쟁단’이라는 조직형식의 한계를 평가하고 보다 체계적이고 조직적인 조직화와 활동의 필요성을 절감하며 노동조합으로의 전환을 모색하기 시작했다. 5월부터 본격적으로 노동조합 설명회와 공청회를 진행하고 정규직 대의원들과 함께 각 업체를 돌며 노동자들로부터 조합가입원서를 받는 등의 준비과정을 거쳐, 2005년 6월 4일 450여명의 조합원들을 바탕으로 금속노조 기아자동차 비정규직지회 창립총회를 진행하기에 이르렀다. 지회설립 당시 450여명이었던 조합원 수는 설립 직후 19개 하청업체들에서 대규모 조합가입이 이루어지면서 1,000여명으로 그 수가 급격히 증가하였다. 


노조설립 직후 비정규직지회는 2005년 임단투 준비에 돌입했다. 애초에 지회는 기아노조와 공동투쟁을 전개하고자 했지만, 8월 26일 기아노조의 파업철회로 공동투쟁은 사실상 무산되고 말았다. 이후 비정규직지회는 수차례의 독자파업을 성사시키며 임단투를 지속해나갔으나, 정규직노조의 임투 종료 직후인 9월 28일 지회의 파업이 진행 중이던 공장에 400여명의 용역깡패가 난입하는 사건이 벌어지게 된다. 그러나 사측의 파업파괴 공작이었던 이 사건은 도리어 정규직‧비정규직 연대투쟁에 불을 붙였으며, 정규직의 연대에 힘입어 지회의 투쟁은 일시적으로 상승세를 타게 된다. 하지만 이러한 상승세는 오래가지 못했다. 정규직‧비정규직을 분열시키고자 하는 사측의 공세가 본격화되었으며, 정규직노조 역시 비정규직지회의 독자파업을 부담스러워했기 때문이다. 결국 10월 7일에 진행된 노동탄압 분쇄와 원하청 공동투쟁 승리를 위한 기아노조의 총파업 투표는 부결되었으며, 이후 비정규직지회의 투쟁은 더욱 하강세를 타게 된다. 그러던 중 10월 20일 지회의 핵심동력에 해당하는 신성물류에 대한 도급계약 해지가 공고되고, 이후 6개 업체에 대해서도 추가적인 계약해지가 공고되자, 조합 탈퇴가 시작되는 등 투쟁은 더욱 위태로워졌다. 이에 10월 25일 선봉대 및 지회간부 20여명이 조립1공장을 기습점거하고 파업을 전개하였으나, 기아노조는 3원칙을 내세우며 지회의 투쟁을 비판하였다. 이후 점차 투쟁력이 고갈되어가는 상태에서 비정규직지회는 기아노조의 중재를 받아들였으며, 하청업체단과 집단교섭을 체결하였다. 

2006년에 들어서 비정규직지회는 원청사용자성 쟁취라는 특별요구를 중심으로 임단투를 준비하였다. 7월 20일 파업선포식 이후 주 2회 이상의 독자파업을 전개하여 생산에 타격을 미치며 사측을 압박하기 시작했으며, 투쟁이 최고조에 달했을 때 조합원 수는 1,300여명으로 늘어나기도 했다. 그러나 2005년 때와 마찬가지로 기아노조는 비정규직지회의 독자파업과 투쟁 장기화에 불만을 표시했다. 이러한 상황에서 사측의 탄압과 정규직노조에 대한 부담, 투쟁 장기화에 대한 우려가 커지는 가운데, 비정규직지회는 역시 정규직노조의 중재로 9월 18일, 19일 양일간에 걸쳐 지회, 정규직노조, 원청이 참여한 교섭테이블에서 회의록 형태의 고용보장합의서를 얻어내는데 성공했다. 


나. 2시기(‘07년~현재 ): 투쟁 소강과 1사1조직으로의 전환


대부분의 자동차업종 사내하청 노동조합들과 마찬가지로 기아자동차 비정규직지회 역시 07년 이후 현재까지 투쟁 소강기를 맞고 있다. 물론 전체 자동차 사내하청 노동운동의 차원에서 보자면 2010년 하반기부터 2011년 초까지 현대자동차 울산공장 사내하청 노동자들의 불법파견 정규직화 투쟁을 중심으로 또 한 번의 투쟁의 파고가 일었다고 볼 수 있지만, 이 투쟁이 다른 사업장 공장 안으로 파급되어 연쇄적인 대중투쟁을 불러일으킨 것은 아니었다. 기아자동차에서도 마찬가지였다. 오히려 기아에서 이 시기는 전반적으로 대중투쟁이 침체되어 있는 가운데, 1사1조직을 둘러싼 극렬한 조직간 대립이 전개되었다 조직통합 이후 그것이 안정화되어가는 과정으로 그려질 수 있다. 기아자동차의 사례만을 보자면 2시기를 조직통합이 이루어지기 전과 후의 시기로 나누어볼 수 있겠으나, 여기서는 전체 사내하청 시기구분에 맞추어 조직통합 전후 시기를 2시기 안에서 함께 살펴보기로 한다. 

2005년과 2006년의 임단투를 거치며 기아자동차 화성공장에서는 비정규직지회의 주체성과 자주성, 독자적 전술구사를 둘러싼 기아노조와 비정규직지회와의 긴장과 갈등이 점차 깊어졌다. 이때를 놓치지 않고 사측은 비정규직지회에 대한 대대적인 탄압을 전개하는 한편, 정규직노동자들에게 고용불안감을 불어넣는 이데올로기 책동을 벌였다. 


이러한 상황에서 기아노조는 2007년 2월에 비정규직지회와의 통합방침을 발표하고, 4월 30일부터 개별적으로 직가입 신청을 받기 시작했다. 비정규직지회는 이것이 지회의 투쟁을 통제하려는 의도를 가진 행위라 비판하며 강력히 반발하였다. 이미 상당한 정도의 조직력과 투쟁력을 가진 비정규직지회의 경우, 정규직노조에 개별적으로 흡수통합되변 기존의 힘과 단결력을 잃게 된다는 것이 그 근거였다. 금속노조 역시 5월 29일 중앙집행위원회에서 지회 조합원을 범위로 한 직가입 사업을 중단할 것을 결정했으나, 기아노조는 개별 직가입을 이어갔다. 이에 비정규직지회는 서둘러 내부 토론을 조직하고 6월 12일 총회에서 ‘지회의 자주적 요구안수립 보장과 현장파업권 인정, 2‧3차 하청 가입보장, 지회 자주적 조직체계 인정과 지부단위에서 비정규할당제 30% 보장’을 전제조건으로 내건 계급적 조직통합안을 가결시키고 기아노조에 요구했으나, 요구는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이후 지회는 2007년 독자임단투를 전개하는 동시에 일방적 직가입 추진에 항의하는 활동을 계속 벌여나갔다. 기아노조와 비정규직지회간의 긴장과 갈등이 고조되어가는 가운데, 지회는 8월 23일 임단투의 일환으로 도장공장 점거파업을 시작했다. 그러나 점거파업 9일째인 8월 31일, 일부 어용 조합원들이 구사대로 돌변하여 파업현장에 난입해 지회와 현장조직의 천막을 불태우고 파업파괴를 위해 폭력을 행사하는 일이 벌어졌다.

8.31 사태는 이후 긴장은 극에 달하고 현장은 얼어붙었다. 이러한 상황에서 금속노조의 중재, 기아노조의 요구, 정규직 활동가들의 미온화된 연대, 정규직 조합원들의 경직된 분위기 등에 밀린 지회는 결국 ‘선통합 후논의’에 합의하였다. 이후에도 여러 혼란과 갈등이 있었지만, 2008년4월과 5월에 기아노조와 비정규직지회 대의원대대에서 각각 규칙개정이 통과되면서 사태는 일단락지어졌다. 


1사1조직으로의 통합 이후 2010년 1월 21일 현재 화성분회는 조직대상 2,500명 중 1,800명, 광주분회는 조직대상 420명 중 318명, 소하분회는 조직대상 500명 중 235명, 총 조직대상 3420명 중 2353명이 조합원으로 가입해있는 것으로 확인된다. 2011년 6월 현재에도 유사하게 화성, 광주, 소하리 공장을 모두 합쳐 총 2,400여명의 사내하청 노동자들이 조합원으로 가입해 있는 것으로 확인된다. 

4. 자동차업종 사내하청 조직화의 쟁점과 과제


1) 불법파견 노동의 유형화


은수미 외(2011)는 원청의 지휘명령 수준과 업무특성―상시성, 핵심업무 여부, 원청기업에 대한 전속성―, 직무특성 기준으로 사내하도급 노동을 네 가지 유형으로 구분하고 있다. [표8 참조] A유형은 원청의 지휘명령이 거의 없고, 업무가 상시적이되 핵심적이거나 전속적이지는 않으며, 직무가 완전히 분리되어 있는 사내하도급 노동을 일컫는다. 일반적인 청소나 시설경비, 전산업무 등이 이 유형에 속한다. B유형은 원청의 지휘명령이 중간수준이고, 업무가 상시적이고 핵심적이되 전속적이지는 않으며, 직무가 중간수준으로 분리되어 있는 사내하도급 노동을 일컫는다. 호텔의 룸메이드나 병원의 조리업무와 같이 핵심구역이나 시설에 대한 청소 및 경비, 조리나 전산업무 등이 이 유형에 속한다. C유형은 원청의 지휘명령이 중간수준이고, 업무가 상시적‧핵심적‧전속적이며, 직무가 중간수준으로 분리되어 있는 사내하도급 노동을 일컫는다. 대부분의 대기업 자동차, 철강, 조선 업무가 이 유형에 속한다. D유형은 원청의 지휘명령이 직접적이고, 업무가 상시적‧핵심적‧전속적이며, 직무가 혼재되어 있는 사내하도급 노동을 일컫는다. 대기업 자동차 및 중소기업 업무가 이 유형에 속한다

지적했듯, 자동차업종 사례들은 주로 C유형과 D유형에 속한다. 현대자동차의 경우, 2011년 7월 대법 불법파견 판정의 근거가 되기도 했듯, 직접적인 지휘명령이 존재하며 업무가 상시적‧핵심적‧전속적이고 직무가 혼재되어 있어 D유형에 속한다고 볼 수 있다. 한편 현재 소송을 준비 중인 기아자동차의 경우, 직무가 중간수준에서 분리되어 있어 C유형에 속한다고 할 수 있겠다. 


한편, 하청업체-하청노동자간 관계에 대한 사법적 판결을 기준으로 사내하청 노동을 유형화해보자면, [표9]와 같이 나타낼 수 있다. 먼저 E유형에서 원청업체와 하청업체는 합법적인 도급계약관계를 맺고 있는 것으로 파악되나, 원청업체가 하청노동자들의 노동조건에 대해 실질적이고 지배적인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는 지위에 있음이 고려되어 하청노동자에 대한 원청업체의 사용자성이 일부 인정된다. 해당 사례로는 현대중공업 판결(2010.3)이 있는데, 판결문에서 대법원은 원청을 노조법상의 사용자로 규정하고 있으며, 따라서 부당노동행위의 주체로서 원청은 그 책임을 져야함을 명확히 하고 있다. 다음으로 F유형에서 하청업체는 독립적인 경영주체로 인정되나 독자적인 작업 지휘명령권을 갖지 못한 것으로 파악되며, 따라서 (구)파견법 고용의제 조항의 적용을 받아 하청노동자는 입사 2년이 경과한 시점부터 원청업체에 직접고용된 것으로 간주된다. 즉, 하청노동자는 원청업체에 불법파견된 것으로 해석된다. 해당 사례로는 현대자동차(울산) 대법 판결(2010.7)과 현대자동차(아산) 고법 판결(2010.11)이 있다. 마지막으로 G유형에서는 독립적이고 자율적인 실체로서의 하청업체의 존재가 부정되고 하청노동자는 처음부터 원청업체에 고용된 것으로 간주된다. 즉, 하청업체는 원청업체의 노무대행기관에 지나지 않은 것으로 파악되며, 따라서 하청노동자는 처음부터 원청업체와 묵시적 근로계약관계에 놓인 것으로 해석된다. 해당 사례로는 인사이트 코리아 대법 판결(2003)과 현대미포조선 대법 판결(2008)이 있다. 

자동차업종에 한정해 보다 구체적으로 논의를 진전시켜 보면, 앞서 지적했듯 [표8]의 유형화에서 자동차업종 사례들은 주로 C와 D유형에 속한다. 원청의 지휘명령은 중상 수준 이상이고, 업무는 상시적‧핵심적‧전속적이며, 직무는 중간수준으로 분리되어 있거나 혼재되어 있다. 여기서 공통점들을 제외하고 세부적인 차이점들을 중심으로 자동차업종 사내하청 노동을 재유형화해보면 [표10]과 같이 나타낼 수 있겠다. 


우선 (가)유형은 작업공간에 직영노동자와 하청노동자가 혼재되어 있으며, 하청노동자가 의장/메인라인에 배치되어 있는 경우를 의미한다. 한 작업공간에 직영 및 하청노동자가 혼재되어 있어 원청업체가 직접적으로 지휘명령하는 경우가 대부분이며, 이는 대체로 불법파견 판정의 강력한 근거가 된다.


2010년 7월 대법원의 현대자동차 (울산공장) 불법파견 판결이 바로 이러한 유형의 작업자에 대한 판결이었다. 다음으로 (나)유형은 작업공간에 직영노동자와 하청노동자가 혼재되어 있으며, 하청노동자가 의장/메인라인뿐만 아니라 기타/서브라인에도 배치되어 있는 경우를 의미한다. 2010년 11월 대법원의 현대자동차 (아산공장) 불법파견 판결이 이러한 유형의 작업자들에 대한 판결이었다. 판결문에서 대법원은 의장공장만이 아니라 차체공장이나 엔진공장에도, 그리고 메인라인만이 아니라 서브라인에도 근로자파견이 해당된다고 판단한 바 있다. 또한 (다)유형은 직영노동자와 하청노동자의 작업공간이 독립되어 있으며, 하청노동자가 의장/메인라인뿐만 아니라 기타/서브라인에도 배치되어 있는 경우를 의미한다. 현재 노조가 불법파견 소송을 준비 중인 기아자동차의 경우가 이 유형에 속한다고 볼 수 있다.

흥미로운 것은 위장도급 시비에 따른 원청업체들의 대응인데, 최근 자동차업종 내에서는 불법파견 시비 및 노조와의 갈등을 피하기 위해 D유형에서 B나 C유형으로 작업조직을 변경하여 진성도급의 외양을 갖추는 경우가 종종 발견된다(은수미 외, 2011). E나 F, G유형의 판결 가능성을 줄이기 위함이다. 이에 따라 (가)와 (나)와 같이 직영노동자와 하청노동자가 혼재된 채 원청업체의 직접적인 작업지시를 받으며 일하는 경우는 점점 줄어들고 있다. 


이와 관련해서는 두 가지 점을 강조할 필요가 있다. 첫째, 직무가 분리되었다 하더라도 그것은 라인수준에서의 분리일 뿐, 작업장 및 사업체 수준에서는 여전히 직무혼재가 발견되는 경우가 많으며(은수미 외, 2011), 따라서 자동차 업종 내에서 여전히 불법파견 노동이 이루어지고 있다고 볼 수 있다는 것이다. 게다가 모비스와 같이 전 공정에 비정규직이 투입되어 라인 자체가 도급화되었다는 주장이 제기된다 할지라도, 도급-불법파견 판정기준에 있어 핵심을 차지하는 ‘노무관리상의 독립성’과 ‘사업경영상의 독립성’을 충족되었다기 보기 어려워 여전히 불법파견의 소지는 남아있다고 보는 것이 옳다(전국금속산업노동조합연맹, 2006: 120). 

둘째, 위장도급 시비가 거듭될수록 진성도급의 외양을 갖추어가는 원청업체의 대응이 점점 더 정교해지고 있으며, 따라서 사내하청 노동운동이 불법파견 정규직화 투쟁을 벌여나가되 사법부의 법리해석과 판결에만 의지해서는 결코 안 된다는 점이다. 예컨대, 현재에도 대부분의 노조들이 불법파견 소송을 진행하는 과정에서 원청업체와 사내하청 노동자간의 묵시적 근로계약 관계의 성립을 1차적으로 주장하고 있지만, 적어도 대기업 수준에서는 묵시적 근로계약 판결이 더 이상 나오기 힘들 것이라는 것이 공통된 전망이다. 원청 대기업의 대응이 도급업체에 명목상의 독립성과 자율성을 부여하는 방식으로 진화하고 있기 때문이다. 마찬가지로, 현재 불법파견 판결이 나오고 있으며 판결의 범위 또한 조금씩 넓어지고 있는 것이 사실이지만, 자동차업종의 경우 원청 대기업의 대응이 작업조직을 재편하여 직영노동자와 사내하청노동자의 혼재생산을 없애고 도급업체에 명목상의 지휘명령권을 부여하는 방식으로 진화하고 있기 때문에, 마냥 좋아하고만 있을 수는 없는 것이 현실이다. 현실의 불법에 맞서 싸워나가되, 사내하청 노동운동이 법정투쟁에만 너무 큰 의미를 부여한다거나 사법부의 법리해석과 판결에만 의지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2) 불법파견 정규직화 투쟁의 의의와 한계


2003~4년 노조설립 이후, 자동차업종 사내하청 노조들은 불법파견 정규직화 투쟁 및 원청사용자성 인정 투쟁에 집중해왔다. 특히 불법파견 정규직화 투쟁은 비록 소수이기는 하지만 사내하청 노동자들의 정규직화 성과를 일부 낳기도 했으며, 하청노동자의 조직화에 있어 중요한 기제로 작용하기도 하였다. 또한 투쟁과정과 실제로 불법파견 판정 및 판결을 받아내는 과정을 통해 금속부문 사내하청 노동자 문제의 핵심이 불법파견-원청사용자성 인정 여부에 놓여있음을 알려내기도 하였다(김정호, 2010: 43). 

그럼에도 불구하고 기존의 불법파견 정규직화 투쟁은 일정한 한계를 노정해왔다. 한계는 불법파견 정규직화와 원청사용자성 인정이라는 운동 의제 자체로부터 기인하는 바가 크다고 볼 수 있다. 이러한 의제는 두 가지 특징을 갖는다. 첫째, 불법파견 정규직화와 원청사용자성 인정은 사내하청 운동단위가 제기할 수 있는 최고 수준의 요구이다. 왜냐하면 이 요구는 산업발달 초기부터 국가의 비호아래 금속 대기업들이 향유해왔던 ‘하청계열화-사내하도급 모델’을 통한 이윤축적 메커니즘의 한 축을 무너뜨리라는 요구임과 동시에, 이 모델의 확산을 통해 열린 ‘전근대의 근대적 재현’(은수미, 2011)에 다름 아닌 사내하청 노동시장의 문을 닫으라는 요구에 다름 아니기 때문이다. 


또한 짧은 시계에서 보더라도 이 요구는 작업장 노사관계를 1998년 이전으로 되돌려 놓으라는 주장과 마찬가지의 의미를 갖는다. 현대자동차를 비롯한 자동차 대기업들은 1997년 경제위기를 고용조정과 작업장 노사관계 재편의 기회로 활용하였다. 현대자동차의 경우, 1998년 정규직 노동자들에 대한 대규모 정리해고를 단행하였으며, 이후 경기회복 국면에서 사내하청 노동력을 활용한 상시적 고용조정 관행을 확립했다. 뿐만 아니라 정규직 노동자들의 고용불안 심리를 파고들어 정규직-비정규직 노동자 분할구조를 완성했으며, 물량을 미끼로 정규직 노동자들의 이해를 회사의 이해에 일치시켜 나갔다. 이러한 상황에서 사내하청 노조의 불법파견 정규직화‧원청사용자성 인정 요구는 수량적 유연성 확보 및 노동자 분할통치의 물적 토대가 되는 사내하청 노동제도를 철폐하고 이 제도로부터 얻는 이득을 포기하라는 요구에 다름 아니다. 

즉, 사내하청 노동운동의 주요 요구사항이었던 정규직화와 사용자성 인정은 자본의 핵심적인 이해관계를 침식하여 자본으로 하여금 한 치의 양보도 없는 비타협적인 투쟁과 하청노조와 노동자들에 대한 극심한 탄압을 불러일으킬 수밖에 없는 요구였던 것이다. 따라서 이 요구의 쟁취가 현실적인 목표가 되었을 때 취약한 조직력과 자원을 가지고 있는 하청노조는 백전백패를 경험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문제의 본질은 자본의 지불능력이 아니다. 자본은 보다 거대하고 본질적인 기존의 이해관계-전근대적 고용관계와 후퇴한 노사관계-를 방어하고 유지하기 위해 최선을 다할 것이다. 


둘째, 불법파견 정규직화와 원청사용자성 인정 요구는 사내하청 노동자들의 투쟁 및 그 효과를 기업의 테두리 안으로 가두는 역할을 한다. 실제로 불법파견 정규직화는 자동차산업 생산위계 전체에 걸쳐져 있는 노동자들의 일반이해를 대변하는 요구가 아니었으며, 간접고용 노동자들의 일반이해를 대변하는 요구 또한 아니었다. 이는 정확하게 불법파견 법리해석에 해당사항이 있는 1차하청 노동자들의 요구였다. 원청 사용자성 인정 요구도 마찬가지이다. 이는 사실상 정규직화 요구와 연동되는 요구이다. 사내하청 노동은 합법도급이 아니라 불법파견 노동이며, 하기에 하청노동자들의 사용자는 하청업체 고용주가 아니라 원청기업 고용주라는 것이다. 따라서 이러한 요구를 중심에 내걸고 사내 2‧3차 노동자들 및 사외 부품업체 노동자들과 연대를 조직하기가 어려운 것은 어찌 보면 당연한 일인지도 모른다. 


물론, 불법파견 정규직화 및 원청 사용자성 인정 투쟁의 정당성이나 의의를 폄하할 수는 없다. 또한 노조가 자기 기업 사안을 중심으로 실천투쟁을 조직하는 것을 문제 삼을 필요 역시 없다. 그러나 어쨌든 사내하청 노조의 투쟁이 자본이 그어놓은 고용분할선을 따라 이루어졌다는 것만은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다. 기업 내에서 1‧2‧3차라는 경계를 넘어서, 또한 기업의 울타리 밖으로 시야를 확대하여 자동차산업 생산위계에 놓인 이질적인 여러 노동자들의 이해를 조직하고 대변하는, 혹은 보다 넓게 간접고용 노동자들의 일반적인 이해를 조직하고 대변하는 투쟁은 아니었던 것이다. 

불법파견 정규직화와 원청 사용자성 인정이라는 핵심적인 투쟁목표의 달성이 불가능했을지라도, 또한 투쟁의 성과가 기업 내 1차하청 노동자들에게만 적용되었을지라도, 어쨌든 투쟁의 성과는 축적되었다. 이를 가능케 했던 힘은 하청노조의 투쟁이 대단히 치열하고 격렬하게 전개되었다는 점, 이들의 투쟁이 전개된 핵심거점인 자동차 대기업에 강력한 정규직노조가 존재했다는 점, 2004년 노동부의 불법파견 판정 이후 사내하청이 예전보다 사회 이슈화되었다는 점 등에 있다. 


이러한 의제 자체의 특성들과 더불어 미흡한 준비 등의 주체적인 요인들로 인해, 기존의 불법파견 정규직화 및 원청사용자성 인정 투쟁은 일정한 한계를 노정해왔다. 한계는 크게 두 가지로 집약될 수 있다. 첫째, 2003년 이후 투쟁의 의도치 않은 결과로서 자동차산업 생산위계에 따른 노동시장의 분단이 더욱 강화되었다. 실제로 2000년 이후 자동차산업 노동시장은 생산위계에 따라 임금수준이 위계화되어, 전반적으로 노동시장의 분단이 강화되는 양상을 드러내고 있다. [표11]을 보면, 월총액임금 기준 현대자동차 정규직 노동자의 임금을 100%라고 보았을 때, 사내하청 노동자의 임금은 73%, 1차부품업체 노동자의 임금은 59%, 2차부품업체 노동자의 임금은 44%로 떨어지는 것을 확인할 수 있다. 즉, 자동차산업에서 노동자들의 임금/소득 수준은 직영-1차사내하청-1차부품사-2차부품사라는 생산위계에 따라 위계화되어 있는 것이다. 

왜 이러한 일이 벌어졌는가. 가장 중요한 원인은 원청사가 비용절감을 위해 사내하청 업체나 외부 부품사를 대상으로 과도한 단가인하 전략을 펼치기 때문으로 볼 수 있다(강민형, 2007: 16-17; 김철식, 2009: 101-105). 또한 주목해보아야 할 점은 노동운동 내적 요인이다. 상술했듯 2003년 이후 사내하청